- 이력을 간단하게 말해달라.
= 고향은 慶尙北道 榮州市 丹山面 東元리이다. 3남2녀의 맏이다. 아버지는 여든여덟 살이고 어머니는 여든세 살이시다.(인터뷰를 한 뒤 얼마되지 않아 아버님은 작고하셨다) 만 다섯 살인 1959년 4월 할머니 등에 업혀 국민학교(분교)에 입학했다. 워낙 산골의 분교라 초가지붕에 흙바닥인 교실이었고 입학준비물은 학생이 앉을, 짚으로 만든 멧방석과 난로피울 나무 한 짐이었다. 어찌하여 계속 학년이 올라 4학년 때 집에서 10리 떨어진 본교를 다니다 졸업후 읍내에 있는 영주중학교로 진학했다 서울로 유학오면 龍山高等學校에 입학했다. 대학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학업에 흥미를 잃고 고향으로 가서 1년 간 농사를 짓다가 도저히 힘들어서 다시 서울로 올라와 학업을 계속했다. 외환은행에서 20년 근무 후 中國銀行으로 이직하여 17년 째 근무 중이다.
- 다섯 살에 입학한 걸 보면 신동이었나.
= 그건 나도 모른다.
- 앞서 만난 두 동문에게도 물어본 것이다. 용산고를 진학하게 된 동기는.
= 중학교 졸업 후 지역의 고등학교로 진학하거나 아니면 유학을 가는데 학교가 경북의 북부에 있어서 대구보다 서울로 진학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름을 들어본 학교는 대부분 후기이어서 전기 가운데 실력에 맞춰 담임선생님이 추천해 입학하게 되었다. 정말 우연히 용고에 오게 되었다. 입학하고 보니 정말 시골 출신이 많은 학교인 걸 알고 다행이라 생각했고 평생을 함께 하고 있는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처음에는 사투리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다.
- 졸업 후 직장생활에 말해달라.
= 졸업을 앞두고 추천으로 79년 1월 외환은행에 취직하여 본점 저축추진부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다. 서울 시내 남대문, 명동, 영업부, 자금부에서 근무하다가 결혼하면서 부천에 자리잡게 되어 몇 년 동안 부천으로 옮겨달라고 하다 87년 인천지점으로 가게 되었다. 인천지점에서 근무하던 당시는 서울올림픽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고 있을 때였는데 중국배와 소련배가 인천항에 들어온 것을 보고 또 은행창구에서 외환거래 업무를 보면서 중국이 굉장히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고객 중에 인천華僑학교 한국어 교사가 있어 그 분에게 중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해서 새벽에 은행에서 1년 6개월 정도 그룹 스터디를 하였다. 그 뒤 진급해 집 가까운 곳이라고 하여 배치받은 반월지점이 당시 교통사정으로 출퇴근 하는데만 몇 시간이 걸려 고민하던 중 臺灣 사범대학의 중국어 연수기회가 와서 90년 연수를 갔다. 연수에서 돌아와 집근처 지점에서 근무하는데 93년 11월 당시 중국은행 서울사무소로 파견명령을 받고 이듬해 9월까지 서울지점 개설업무를 도와주다 다시 北京으로 석달간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근무중엔 간간히 중국의 금융계 인사들이 오면 통역을 하기도 하였다.
- 기회를 잘 살리고 자신의 능력을 키워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이네. 命은 주어지지만 돌고도는 運은 자신이 잡는다고 하는데 서동욱 동문이 좋은 본보기이다. 당시는 외환은행은 좋은 은행인데 중국은행으로 옮긴 계기나 이유는.
= 중국은행 서울지점이 설립되고 외환은행으로 복귀할 때 중국은행쪽에서 같이 근무하자는 요청이 있었으나 거절하고 94년 9월 복귀하였다. 중국은행에서는 근무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하여 2년 반 정도 지난 97년 3월 근무의사를 전하고 본점 부행장이 방한할 때 면접까지 보았으나 연락이 없어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 해 7월 외환은행에서 中國 大連지점으로 발령이 나서 중국은행에 인사차 들르니 그동안 본점에서 의논할 기회가 없었다며 마침 본점의 구두로 입행허가가 났다는 연락이 왔다고 했다. 중국은행에서는 외환은행 대련지점에서 근무하다 될 수 있는대로 빨리 오라고 하여 기회를 보던 중 98년 금융위기가 일어나자 12월 중국은행 서울지점에 근무를 시작해 지금에 이르렀다.
- 중국은 세계 양대 강국이 되어 한반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거에도 그렇지만 중국과의 관계는 중요하다. 특히 중국은 지난 70여 년간 우리와 동맹관계인 미국과 서태평양의 패권을 놓고 한판 승부를 겨룰 태세이다. 미국은 일본과 새로운 동맹을 맺고 중국의 진출을 막으려 하고 있다. 분단된 땅에 주변 강국의 세력다툼까지 겹쳐있어 한국의 선택에 어려움이 조성되고 있다. 안에서는 이념 지역 세대 간에 갈등이 여전하다. 중국은행은 이름그대로 날로 커져가는 중국경제의 첨병이라고 할 수있겠다. 중국은행에 대해 듣고 싶다.
= 중국은행은 辛亥革命 이듬해인 1912년 설립되어 한때 중국의 중앙은행 역할을 하다가 1949년 공산당 정부가 들어선 뒤 중앙은행인 中國人民銀行의 최소한의 대외거래를 위한 외환전문은행으로 있다가 1994년 개혁개방의 물결이 일면서 국유 상업은행으로 다시 탈바꿈했다. 자본구성은 중국 재정부가 설립한 지주회사가 67%의 지분을 갖고 있고 나머지 지분은 上海와 홍콩(香港)에 상장된 주식회사이다. 인민은행에서 분리될 때 외환전문은행이었으나 점차 외한업무가 모든 상업은행으로 확대되면서 아직 업무 점유율에서는 우위에 있지만 다른 중국계 은행과 차이가 없다. 약 11,500개의 영업점이 있으며 국내에 11,000개 해외에 620개이 점포가 있으며 직원은 30 여만 명에 이른다. 이 중 해외 점포직원이 23,000명이다. 본점은 北京에 있으며 그 아래에 본점이 직접 관리하는 각 省級 지점과 해외 지점이 있고 다시 그 하부에 市級 지점이 있는 3층 관리구조로 되어 있다. 대부분의 중국의 은행이 이런 다층 관리구조이다.
- 그러면 서울지점의 구성과 업무는 어떠한가.
= 1992년 韓中修交이래 사무소로 시작한 서울지점은 앞서 말한대로 1994년 1월 지점으로 전환하여 안산, 대구, 구로에 관할 지점을 두고 약 150명의 직원이 근무한다. 그 중 중국에서 파견된 직원이 20명이고 나머지는 우리나라에서 채용되었다. 우리나라 시중은행과 같은 업무를 하고 있으나 특성상 중국관련 업무가 많고 고객구성은 중국과 관련된 대기업과 한국에 와있는 중국인, 중국과 관련된 한국인(중국관련 사업은 하거나 가족이 중국에 있든지 본인이 중국에 자주 다니는 등)이 대부분이다. 최근에는 한국인 고객비중이 30% 정도로 늘어났다. 총자산은 우리나라 돈으로 18조 원 정도이고 2014년에는 법인세 납부후 1억 달러의 당기순이익을 달성했다.
- 서울지점의 근무는 어떤지.
= 개점 초기에는 중국에서 파견되는 직원이 본점이나 沿海地方에서 많이 지원했으나 중국 국내의 소득수준이 올라가면서 최근에는 내륙지방인 四川, 雲南, 湖南省 등에서 지원하는 직원이 늘어나는 추세다. 대부분 공산당 당원이나 공산당청년조직인 공산청년동맹(공청) 당원이며 근무시 대단한 사명감을 갖고 있다. 참고로 중국 공산당원은 전 인구의 5% 가까운 8,000 만명 내지 9,000 만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공청당원 되는 것도, 정식 당원이 되는 것도 조건이 까다로운 것으로 알고 있다. 정책적인 의사결정은 대부분 위원회 등을 통해서 토의된 내용을 대표실(대표, 부대표 3인) 회의에서 최종 결정하고 전원 찬성이 아니면 계속적인 의사소통과정을 거쳐 최소한의 반대의견이 없어야 결정해 시행하는 형식을 취한다. 한국인 직원들은 수시로 결원이 생기거나 인원이 필요할 경우 채용하며 이전에는 중국어 전공자 위주였으나 최근에는 다른 전공을 한 경우라도 필수요원인 경우 헤드헌팅회사를 통해 뽑는다.

- 중국은행 이야기는 이쯤하고 산행이야기를 하자. 동기 산행모임도 열심히 참여하고 외국 산도 자주 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계기가 있었나.
= 직장생활을 하면서 지리산 설악산 덕유산 종주 등 국내 유명 산의 종주산행을 하였다. 그러다 臺灣 어학연수를 갔을 때 외롭던 차에 우연히 현지인들과 함께 11박12일 동안 3,000 여m 이상의 산 10 여개를 종주하면서 장거리 고산산행의 매력이 푹 빠져들었다. 중국은행으로 옮기고 휴가를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돼 먼저 킬리만자로를 도전해 오른 뒤 러시아의 엘브르즈, 네팔의 안나푸르나, 에베레스트, 마나슬루 베이스캠프,와무스탕 지역을 다녀왔으며 티베트에서 가는 중국쪽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와 메리설산, 쓰꾸냥산, 그리고 캐나다 로키, 뉴질랜드의 밀포드, 몽블랑 라운드 트레킹 등을 다녀왔다. 4월 27일부터 14박15일간 5,500m 고개를 넘는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킹을 가기로 하고 예약까지 마쳤는데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셔서 포기했다. (이 트레킹은 네팔지진으로 전면 취소되었다. 서 동문의 블로그에 그의 산행기를 들어가면 볼 수있다)
- 중국은행으로 옮기고 휴가를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됐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 중국은행은 법정휴가를 보장한다. 현재는 연월차 휴가를 합쳐 25일 정도 된다. 휴가를 쓰지 않았다고 해서 한국과 같은 현금보상은 없다. 몰아쓰던 나눠쓰던 관계없다. 휴가만 보면 중국은행의 근무여건이 외환은행보다 좋다.
- 가본 산 중에서 인상 깊었던 산을 꼽는다면.
= 모든 산이 인상에 남지만 굳이 들자면 정상을 눈앞에 두고 내려와야 했던 엘브르즈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5,642m로 코카사스산맥에 있는 산이다. 6, 7년 전 여름, 정상을 200여 m를 앞둔 5,400m에서 고소증세로 더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걸어내려 왔다. 함께 올라간 일행은 설상스키로 내려왔지만 나는 걸어서 내려와야 했다. 이 산보다 높은 킬리만자로(해발 5,895m)도 올랐지만 고소적응에 실패하고 날씨때문에 결국 포기해야 했다.
- 엘브르즈에 간 동기가 있었나.
= 킬리만자로에 다녀온 뒤 유럽의 최고봉을 가보자. 7개 대륙의 최고봉을 오르는 즉 Seven Summit에 도전해 보자고 생각해 두번 째로 택한 것이다. 엘브르즈 등정을 못하면서 세븐 서밋도 포기하게 되었다. 자신이 생기지 않더라. 산은 높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산이 받아 주지 않으면 아무리 가고 싶어도 안된다는 것을 느꼈다.
- 서 동문에게 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산은 에너지를 주는 충전기 같다. 한번 다녀오면 생활이나 업무에 활력을 준다. 비화 하나를 얘기하겠다. 30대 때 회사 업무로 스트레스가 심해 신경정신과를 스스로 찾아가 의사와 상담을 했다. 의사는 나를 약간 정신나간 사람으로 취급하고 신경안정제를 주었다. 안 되겠다 싶어 산에 열심히 갔다. 서울 근교 산도 가고 안내산악회를 따라 전국의 산을 올랐다. 육체적 고통이 아무리 심해도 직장에서 받는 고통과 비교하면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원광대 趙龍憲 교수는 산에 올랐을 때의 희열을 mountain orgasm이라고 했다) 산행을 일상화하였고 앞에도 얘기했듯이 중국은행에서 휴가를 이용해 범위도 세계의 산으로 넓혔다.
- 앞으로 가고 싶은 산은.
= 꼭 가고 싶은 산을 꼽자면 티베트 불교 성지라는 카일라스와 인도쪽 히말라야지역, 남미의 파타고니아 그리고 여러 트레킹 코스다. 시간과 체력, 경제적 여건이 허락하는 한 많은 곳을 가고 싶다.
- 그렇게 되길 바란다. 해외산행은 혼자 다녔나. 부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 지난 2002년 암수술을 받아 다닐 수 없는 상황이고 또 혼자 가는 것을 양해한다. 뉴질랜드의 밀포드 트레킹은 함께 갔다.
-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중국은행은 언제까지 다닐 수 있는지.
= 중국직원의 정년은 만 60살이고 한국에서 현지 채용된 직원은 55살로 중국정년을 적용받는 나는 이미 넘었다. 해마다 1년 단위로 계약하는데 자의든 타의든 언제든지 그만들 수 있다. 통보가 오면 그만둘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데 현 지점장이 자신이 재임하는 동안은 같이 근무하자고 한다. 느낌상 내년 7월까지는 있지 않을까 한다.
- 퇴직 후에는 제주도로 가는 걸로 알고 있다. 은퇴 후 계획은.
= 제주도 동쪽 성산읍의 중산간 마을에 집터를 사놓고 주택건축회사에 현재 설계를 맡긴 상태다. 언제든지 그만 두면 집을 짓고 이사할 생각이다. 제주도에 중국인 투자도 많고 관광객도 많이 오니 그런 쪽에 프리랜서로 기회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방송통신대 관광학과를 졸업했으나 관광통역사 자격증은 아직 따지 못했다. 준비중이다. 집사람도 같이 가기로 했고 땅도 집사람 명의로 했다.
- 자녀는
= 딸이 둘인데 큰딸은 결혼해 출산휴직중이고 둘째는 무역회사에 다니는데 아직 미혼이다. 제주도로 가기 전에 결혼했으면 좋겠다.
- 5남매의 맏이로 살아오면서 어려움도 있었을 텐데.
= 시골 출신으로 서울에 살면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도 그렇고 맏이로서도 부담을 안고 살게 마련이다. 그래서 한가지 실천하는 게 있다. 매달 한번씩 다섯 형제가 모여 점심을 같이 먹는 것이다. 중국은행으로 옮긴 후 매달 하고 있다. 모두 서울에 살다가 요즘에는 막내남동생이 울산으로 근무지를 옮겨 4명이 모인다. 이러다보니 형제간에 우애도 생기고 부모님께도 모두 스스로 잘해왔다고 생각한다. 내가 얘기하지 않아도 고향에 자주 내려간다.
- 그동안 살아오면서 갖고 있는 좌우명은.
= 물 흐르듯이 사는 것이었다. 上善如水라는 말을 늘 새기고 있다.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 외국인과 어울려가며 알차게 살아가는 徐 동문의 삶은 上善如水 그대로라고 하고 싶다. 참으로 잘 살아왔고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러리라 본다. 인터뷰에 응해줘서 고맙다. 글 柳熙洛
사진설명(위에서부터)
1. 네팔 마나슬루 라르캬패스 정상에서
2. 라르캬 패스 정상에서 동료들과 함께

3. 아내와 함께 55마일 밀포드 트레킹을 끝내고

4. 중국 사천성 쓰꾸냥산의 따꾸냥산 정상

5. 유럽최고봉 엘브르즈를 오르며

6. 아프리카 최고봉 우후르 피크(5,895m)

7. 언젠가 산행 후에 보니

8. 24년전 대만에서 종주산행끝에 마지막 정상에서 지나온 산들의 표지를 들과 고락을 같이 한 동료들과

감사합니다.